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눈물로 써 내려간 어미의 편지
‘방방곡곡’-김민지 문화평론가의 책 이야기

김민지 문화평론가 | 기사입력 2023/01/03 [08:01]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눈물로 써 내려간 어미의 편지
‘방방곡곡’-김민지 문화평론가의 책 이야기

김민지 문화평론가 | 입력 : 2023/01/03 [08:01]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영웅스틸컷© 화순매일신문


누구든 소중하지 않은 목숨 있으랴
.

 

화순시네마에서 영화를 보았다. <영웅>이다. 웅장함에 매료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푹 빠졌다. 며칠 동안 들었던 멜로디가 입에서 계속 맴돈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본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찾아보니 장부가이다.

 

안중근은 아내에게 로마교황청 관광에 초대받았다고 말한다. 실상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독립전쟁하러 나서는 길이다. 그걸 아내와 어머니도 알고 있다.

 

소중한 몸을 열 달 동안 잉태했다가 낳은 첫정()이다. 아들과의 마지막을 직감한 듯하다. 어미는 아들의 건강과 안부를 살뜰히 챙긴다. 다음 어머니 생신 때 뵙자는 인사 뒤 떠난다. 아내 김아려 여사에게는 무뚝뚝했지만, 어머니에게만은 살가운 아들이다. 중근이 그리울 때마다 앞마당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무 대사도 없다.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또 다른 물건은 응칠(중근의 아명)의 배냇저고리. 배에 품고 한 땀 한 땀 수놓았을 어미의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을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조마리아 여사. 그것이 복선이다. 이 편지를 쓴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눈물로 써내려간 어미의 편지다. 아이를 키워보니 그 어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싶다. 어미의 마음으로 안중근 의사를 바라보니 가슴이 미어진다.

 

 

  © 화순매일신문


<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흐름출판. 2021)가 떠올랐다. 지은이 김범석은 서울대학교 암 병원 종양내과 전문의다. 항암치료를 통해 암 환자의 남은 삶이 의미 있게 연장되도록 암 환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환자들과 가족들이 그려가는 마지막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렇게 얻은 깨달음을 잊지 않기 위해 남겨온 기록이다. 책은 ‘1부 예정된 죽음 앞에서, 2부 그럼에도 산다는 것은, 3부 의사라는 업, 4부 생사의 경계에서로 구성되어 있다.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지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대학교 종양내과 의사가 기록한 마지막 순간들이다. 김범석 선생님이 종양내과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다. 선생님의 아버지도 폐암으로 돌아가셨단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힘든 길인 줄 알았을 텐데 왜 시작했는지 말이다. 책과 영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있다. 본문 중에 한동일 선생님의 저서 <라틴어 수업>에 언급되는 라틴어 명구 중에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이 있다. 오늘 누군가의 죽음은 내일의 내가 닿을 시간이고, 어떤 죽음들은 분명히 아직 남아 있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지금 내가 누리는 오늘은 다른 사람이 간절히 원했던 시간이었으리라. 인상 깊었던 두 이야기가 떠오른다.

 

하나는 30대 후반의 암 환자가 암과의 사투를 벌인다. 더 이상 쓸 약도 없단다. 곧 세상을 떠날 것만 같은데 버티는 모습이 역력했다. 웬만한 사람 모두 만났다. 그는 아직 어린 자녀들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환자는 아이들을 만난 지 1시간이 지나 생을 마감했다. 그토록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남은 가족들이 염려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또 다른 하나는 어느 날 문득 택시 안에서 몇 년 전 환자와 재회한다. 암에 걸리자 인간관계가 정리되었단다. 밥 사주려는 친구, 돈 빌려 달라는 친구들. 죽을 줄로만 알았던 이 환자의 이야기는 암을 이겨내고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택시 운전하며 욕하던 날이 있기도 했는데 요즘은 소풍 나온 것 같단다. 그야말로 인생 리셋.

 

대학병원 응급실에 며칠 전 다녀왔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빈 침대가 없을 정도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모호(模糊)하다. 갑자기 왔느냐 준비된 것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끝은 같다. 책을 읽는 내내 주변을 정리하며 사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원한 이별 앞에 남은 자가 받아들일 슬픔을 줄여줄 것 같아서였다.

 

손에 모래를 힘줘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이내 빠져나간다.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에게 사랑의 말을 전해보자. '이별'이라는 상실은 쉬이 잔잔해지지 않는 마음속 파도이다. 장부가를 들으며 눈물로 써 내려간 어미의 마음을 느껴본다. 언제 올지 모를 사고든 질병이든 큰 병에 걸린다면 삶을 부정하지 않으련다.

 

김민지 문화평론가의 서평은 네이버 블로그(mjmisskorea) ‘애정이 넘치는 민지씨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방방곡곡은 다양한 책과 문화 속으로 떠나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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