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務安)은 반도(半島)입니다. 한반도를 닮았어요. 서해와 영산강이 빙 둘러싼. ‘물 안’에 있다고 해서 무안이라는 말도 있지요.
황토와 갯벌의 고장입니다. 봄과 여름 사이, 양파를 캐내고 난 밭은 붉음 그 자체입니다. 황토밭 너머 바다 풍광을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겁니다. 한여름은 당연히 회산백련지고요.”
무안을 힐링 1번지라고 하는 의미를 물었더니,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면서 떠날 때쯤이면 느끼게 될 거라고 했다.
7월 21일, 회산백련지를 찾았다. 장관이었다. 10만여 평 저수지에 연(蓮)이 가득했다. 동양 최대의 백련 자생지라는 말이 실감 났다. 예전엔 이곳이 전부 바다였다. 일제강점기 때 둑을 쌓아 논이 되었다. 징용 끌려가는 대신에 제방 쌓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한 저수지가 백련지다. 둘레길이 저수지 둑인 셈이다. 영산강 하굿둑을 막고 저수지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1997년 연꽃 축제가 처음 열렸다. ‘품바’도 이곳 들녘에서 시작되었다.
‘무안백련’은 한꺼번에 피었다가 지는 대개의 연과 달랐다. 하나가 피어 지고 나면 다시 하나가 피어나고 한여름 석 달 동안 쉼 없이 피고 진다. 꽃 생김새도 특이했다. 어린 봉오리는 끝이 연한 분홍빛이다. 커가면서 전체가 순백색으로 변한다. 이른 새벽 솟아오른 연꽃은 오후가 되면 봉우리를 오므리며 연잎 사이로 숨어든다. 가장 아름답고 생생한 연꽃은 이른 아침에 볼 수 있다.
제방을 따라 한바퀴 도는 한 시간쯤, 버드나무 느티나무 그늘로 바람만 드나 들었다. 한여름의 더위는 없었다. 무안백련 외에도 세계 각지의 연들이 시샘하듯 각자의 자태를 뽐냈다. 법정스님도 이곳을 다녀갔던가 보다. 그의 수필집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마치 정든 사람을 만나고 온 듯한 두근거림과 감회를 느꼈다, 고 소회를 남겼다.
가는 길에 서울 북악에 비유된다는 남악에 들렀다. 오룡산을 등지고 영산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 지형으로 오룡쟁주의 터라고 했다.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갖고 다투다 되돌아온다는. 무안 승달산(佛)과 목포 유달산(儒)과 영암 선황산(仙)을 이은 삼각형의 중심으로 유불선의 삼교가 회통하는 터라는 견해도 있으니, 전남도청이 들어서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했겠다.
곧장 서해로 나아갔다. 무안국제공항을 우로 두고 가다가 좌측 길로 들어섰다. 낮은 구릉지가 부드럽게 펼쳐졌다. 군데군데 곱게 갈아놓은 밭이 붉었다. 잠자리가 어지럽게 날고 매미 소리 들렸다. 그 위로 배경처럼 비행기가 눈부시게 날았다.
망운면 송현리 조금나루에서 노을길이 시작되었다. 북쪽 현경면 봉오제까지 10km 남짓의 도로였다. 구불구불 바닷가를 따라 숨은 듯 끊기듯 이어졌다. 바닷가 풍경을 즐기기에 좋았다. 좌로는 소나무 숲이, 모래사장이,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갯벌이었다. 우로는 붉은 속살을 보일 듯 말 듯 비춰주는 황토밭이었다.
무안의 특산물을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낙지공원’도 있었다. 외계 생물체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14m 높이의 낙지 모형 전망대가 인상적이었다. 올라갈 때는 계단이고 내려올 때는 미끄럼틀인. 밤이 되면 모래사장과 바닷물이 더 멋지다고 하는데 내가 갔을 때는 낮이었고, 바닷물은 멀리 있었다. 이래서 여행도 삶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가 보다.
쓰러진 황소도 일으킨다는 것이 낙지다. 이곳에서 나는 것을 세발낙지라고 하는데, 발이 세 개가 아니고 가늘어서[가늘세; 細] 세발낙지다. 본래 세발낙지는 영암이었다. 방조제 공사로 갯벌 사라진 이후 무안이 명성을 이었다. 신안은 뻘낙지라고 부르는데 모두가 세발이다. 갯벌이 부드럽고 먹이도 풍부하여 힘들이지 않고 살아가다 보니 굳이 굵은 다리가 필요 없었겠지.
무안이 고향이라는 후배가 있었다. 낙지는 가을 찬 바람 불 때가 제일이라며 생각만 해도 설렌다고 했다. 맛이 야해서 그렇다며. 산골 태생인 나는 그 가슴설레게 야한 맛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그 맛을 짐작할 때쯤 그 애는 아이 엄마가 되어 있었다.
한때 낙지가 세계 혐오식품 순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최민식이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산낙지 먹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이때부터 낙지의 인식이 바뀌었다. 외국 관광객도 즐겨 찾는 메뉴가 되었다. 영화가 낙지 명예를 살린 셈이다.
예전엔 간척 예정지였었다. 갯벌은 농토보다 100배 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는 아닐 것이다. 간척하겠다고 했을 때는 쌀이 더 필요했을 것이고, 철회를 결정했을 때는 갯벌의 가치도 보였을 것이다. 선택의 옳고 그름이라기보다는 시대 상황에 맞는 가치판단의 문제였으리라.
소나무 숲과 바다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었다. 3km쯤 되는 숲길을 바람이 살랑거렸다. 솔 향기가 실렸고, 원추리꽃이 노랗게 흔들렸다.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바다는 멋졌다.
작년 가을 월출산을 올랐을 때다. 영산강을 서해를 굽어보며 김밥 한 줄에 구운 계란 한 알 꺼낼 때, 옆에선 드립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래 마니아라면 저 정도의 열정은 있어야지. 전쟁통에 술동이 하나 챙겨 피난 길 나섰다는 애주가도 있었다는데. 그 후로 습관처럼 커피를 챙겼다. 드립백을 컵에 걸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물을 부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이 배경처럼 흐른다. 애잔한 분위기의 기타 연주곡에서 노을 냄새가 났다.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 그라나다의 상징이며 이슬람 문화의 걸작이다. 붉은 돌과 벽돌로 지은 성채가 저녁노을에 반사되면서 붉게 물들기에 아랍어로 '빨간색의 궁전'이란 뜻이란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다방이 차려졌다. 바다와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들, 노을을 기다렸다. 풍경이 축복하는 듯, 커피 향기는 높게 날았고, 부드러운 기타 선율은 낮게 가라앉았다. 노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백사장을 거닐었고, 갈매기에게 말도 걸었다.
“칠십을 넘기고 나니까 세상사 별거 있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랑 3개월 여정으로 스페인과 모로코 구석구석을 돌아볼 요량입니다. 젊어 왔을 때는 언제라도 다시 올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면 지금은 언제 다시 올 수 있겠냐는 생각에 느낌이 다릅니다. 빵을 통한 인생의 구도자처럼 이집 저집 빵집을 돌며 걷는 길도 나름 행복입니다.”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나 휴가와는 다를 것이다. 왜 여행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보라고들 한다. 인생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데, 아직은 모르겠다. 라디오에서는 ‘목포의 눈물’이 흐른다.
도움을 준 무안군 조기석‧최명숙 전남문화관광해설사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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