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이 낳고 키운 한양 아래 작은 서울

전남 나주시에서 하루…‘금성관’·‘국립나주박물관’

김재근 객원기자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 | 기사입력 2024/07/05 [08:01]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영산강이 낳고 키운 한양 아래 작은 서울

전남 나주시에서 하루…‘금성관’·‘국립나주박물관’

김재근 객원기자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 | 입력 : 2024/07/05 [08:01]

 

 

▲ 느러지 전망대 가는 길. 수국이 반겼다.  © 화순매일신문


전라도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고향을 물으면 선뜻 답하지 못했다
. 그래서였을 것이다. 고향에 와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전라남도 여행이었던 까닭이. 22개 시군 중 어느 곳부터 시작할 것인지 한동안 망설였었다.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가 나주를 권했다. ‘남도의 천년 고도라는 것이 이유였다. 하긴 전라도라는 지명도 전주와 나주에서 오지 않았던가.

 

622, 장마가 시작되었다. 양성숙 나주시 전남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나기로 한 곳은 금성관 뜨락이었다. 빗줄기가 칼국수 면발 같았다. 약속 장소를 바꾸었다. 금성관 앞 2층 카페로. 빗물 흐르는 창가에서 예가체프 커피향에 인사를 담아 건넸다.

 

창밖에선 금성관이 비에 젖고 있었다. 한동안 커피를 마셨고, 수다를 떨었다. 양 해설사의 박물관 근무 이력이 실감 났다. 역사와 문화에 해박했다. 물었다. 나주에서 딱 하루가 주어졌을 때,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어야 하느냐고.

 

나주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영산강이 아닐까요. 고대 문화의 중심지니 천년 목사골이니 모두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산강이 나옵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나주가 한양과 닮았다고 하면서 소경(小京)이라 하였죠. ‘한양 아래 작은 서울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영산강에 의지한 나주 지형이 한양을 쏙 빼닮았답니다.”

 

▲ 목사 내아 마루. 빗멍하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 화순매일신문


카페를 나섰다. 금성관(錦城館)은 안보다는 밖에서 보는 모습이 더 좋았다. 담장 안 너른 잔디밭이 나주 객사(客舍) 터다. 객사는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며, 외국 사신이나 중앙 관리가 사용하던 숙소였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라고나 할까.

 

중심 건물인 금성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셨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일제강점기 때, 나주군청으로 사용되었다.

 

비는 줄기차게 내렸다. 금성관 옆 목사 내아로 갔다. 나주 목사 사택이다. 커다란 팽나무가 있는 집이다. 마루에 앉았다. 낙숫물 소리가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에 묻힌다.

 

저기 팽나무가요. , 대충 정확하게 500살가량 될 거예요.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을, 시민들이 살렸습니다. 그 보답인지 행운을 준다네요. 소원 꼭 빌고 가세요. 한옥 체험도 할 수 있어요. 일반 고택과는 다른 느낌이 날 겁니다.”

 

금성관 바로 앞이 나주곰탕거리다. 가게마다 길게 늘어섰다. 대열에 동참했다.

 

일제강점기 때 나주에 소고기 통조림 공장이 있었어요. 살코기만 통조림으로 만들어 군수물자로 실어 갔죠. 남은 부산물로 끓인 장터국밥이 나주 곰탕의 시작이었죠. 1970년대 초 오일장터였던 곳이 곰탕 거리가 되었습니다. 방식도 양지하고 사태를 푹 고는 것으로 바뀌었고. 지금의 나주 곰탕 형태가 탄생한 겁니다.”

 

▲ 나주곰탕. 맑은 국물에 향이 깊다.  © 화순매일신문


곰탕의 본향에서 먹는 맛은 달랐다. 맑은 국물에 이리도 깊은 향이라니. 입안에 오래 머물렀다.

 

반남면 고분 가는 길. 강을 건넜다. 멀리 황포 돛배가 강변에서 한가롭다. 영산포 홍어 거리를 지나 남으로 향했다. 가도 가도 너른 들판이다. 논이 끝없이 이어진다.

 

넉넉해 보이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데요. 반남고분에서 무기류가 많이 안 나오는 이유가 이거라고 생각해요. 굳이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요. 주위에 먹을 것이 넘쳐 났으니,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싸울 일이 없었겠지요.”

 

차창 밖으로 고분들이 스친다. 경주와 달랐다. 부여나 공주의 그것과도 같지 않았다. 대지의 여신이 누워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평평한 대지에 봉긋 솟은 봉우리를 만지듯 손을 멀리 뻗어 보았다.

 

▲ 국립나주박물관. 독널 뒤로 영원한 안식이라는 영상이 흐른다.  © 화순매일신문


국립나주박물관은 고분들을 앞마당으로 삼았다. 넓게 옆으로 지어진 건물이 편안했다. 고분문화실로 갔다. 고분에서 출토된 독널이 전시된 공간이다. 국사 시간에 옹관묘라고 배웠었던.

 

고대 영산강 유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무덤을 만들었어요. 봉분을 크게 만들고 마치 지금의 아파트처럼 여러 개의 독널함께 묻었습니다. 커다란 토기 항아리 두 개를 붙인 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독널 더미 뒤로 벽면에 '영원한 안식'이라는 영상이 흐른다. 연기가 피어올라 사람이 춤을 추는 모양이 나온다. 제목을 잘못 붙인 것 같다. 궁금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안식처를 파헤쳤다. 쉴 곳을 잃어버렸다. 차라리 영원한 방랑이나 영혼의 한이 더 어울릴 듯하다.

 

마지막 여정은 느러지 전망대. 느러지는 무안군 몽탄면 땅이다. 전망대는 나주시 동강면에 있고. 땅 임자인 몽탄사람은 늘어지라고 부른다. 영산강은 담양 용추봉 가마골에서 발원하여 광주, 나주, 영암을 거쳐 목포로 흐르는 호남의 젖줄이다. 나주평야를 지나며 유속이 느려진다. 위에서 힘들게 안고 온 흙모래를 내려 놓는다. 땅이 길에 늘어진 모양인 느러지를 만들었다.

 

빗줄기는 함흥냉면 면발처럼 가늘어졌다. 전망대 오르는 길에 수국이 만발했다. 자귀나무 꽃향기도 자욱하고. 전망대에 섰다. 한반도 지형을 닮은 느러지를 영산강이 우에서 좌로 돌고 돌고 돌며 흐른다. 아니, 호수처럼 잔잔하다. 고고한 듯 순박하고, 순박한 듯 강인하고, 강인한 듯 부드럽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다.

 

비 오는 날의 풍경도 좋네요. 저녁노을이 내려앉으면 그야말로 장관이지요.”

 

▲ 느러지 한반도 지형. 나주에서 무안을 보다.  © 화순매일신문


돌아오는 길은 영산강변도로를 택했다. 나주시에서 출발하여 목포에 있는 전남도청을 연결하는 강변도로다, 지금은 무안 몽탄까지다. 몽탄대교를 건넜다. 우측으로 강이 흐른다. 무안이 물러서고, 함평이 지난다.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나주시입니다.’

 

나주는 오래되고 넓은 고장이에요. 애정을 주면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천연염색박물관, 빛가람 전망대, 도래 한옥마을, 반남공원도 둘러보세요. 문화관광해설사가 친절하게 안내해 드릴 겁니다.”

 

이글은 네이버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맛담>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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