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고을 강진, 역사의 길을 걷다

‘영랑’생가·사의재·하멜기념관·고령청자 박물관 등

김재근 객원기자,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 | 기사입력 2024/09/27 [07:01]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청자고을 강진, 역사의 길을 걷다

‘영랑’생가·사의재·하멜기념관·고령청자 박물관 등

김재근 객원기자,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 | 입력 : 2024/09/27 [07:01]

▲ 영랑생가. 장독대 옆에 <오매 단풍 들것네> 시비가 있다.  © 화순매일신문


누이가 장독에서 장을 푸고 있었다
. 새빨간 감잎 하나 날아왔다. 깜짝 놀라,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 연휴가 시작하는 916, 영랑생가 장독대에 비와 구름과 햇살이 오고 갔다. 날씨는 무더웠고 감나무는 파랬다. 단풍은 멀리 있었다.

 

강진에 오면 습관적으로 영랑생가부터 찾는다. ‘경로의존성이라고 탓하면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우연히 어떤 길에 들어서고 나면 더 좋은 길을 알아도 가던 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대개 여행 패턴이 그러한 건 아닐까.

 

영랑생가에서 고향집에 온 듯한, 포근한 어머니 품에 안긴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강진읍 뒷산 아래, 집 뒤로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 숲과 앞쪽 담장 큼지막한 은행나무와 마당 옆 해묵은 동백나무가, 초가와 잘 어울렸다. 안채와 사랑채도 넉넉하여 답답하지 않았다.

 

영랑 김윤식은 1903년에 태어나 1950년 한국전쟁 중 서울에서 포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서정시인이면서 독립운동가였다. 17세 때 강진 31 만세 운동 모의 혐의로 옥살이를 하다가 어린 학생 신분이라는 점이 고려돼 6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48년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가기 전까지 이 집에서 45년을 살았다. 생전에 8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는데 60여 편을 이곳에서 썼다. 이사 후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뀐 것을 1985년 강진군이 사들여 본래 모습으로 가꾸었다.

 

추석 연휴를 맞아 나들이객이 많았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집 안 가득 추억이 넘실댔다. 모란을 이야기하다가 양희은의 <하얀목련>을 흥얼거렸고, 마루에 앉아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시를 읽으며 학창 시절을 추억하기도 했다. 연륜이 깊어 보이는 여인은 한동안 부엌을 떠나지 않았다.

 

▲ 까치내 고개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진읍 전경. 멀리 강진만이 보인다. 읍과 만나는 부분에 남포마을이 자리 잡고 그 앞 일대가 강진만 생태공원이다. 좌측이 고려청자박물관, 우측은 다산초당이 있다.  © 화순매일신문


대문을 나서면 시문학파기념관이다. 1930년대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던 문학동인회, 아홉 시인을 만날 수 있다. 걸어서 5분 거리에는 김한구의 생가가 있다. 시문학파동인인 영랑과 한구는 한 살 차이였고 함께 한학을 공부했다. 영랑이 서울에서 공습으로 죽은 해, 한구는 강진 낙화정에서 좌익에 의해 총살당했다. 낙화정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자리에 강진 31운동기념비가 들어섰다.

 

영랑생가 바로 옆이 군청이고, 사의재 저잣거리도 지척이다. 인근에 괜찮은 식당도 카페도 많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은 후 커피를 마시며 오후 일정을 가늠했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18년 유배살이 동안 거처를 네 번 옮겼다. 주막집에서 4년을 지내며 사의재라고 하였다. 고성사에서 보은산방이라고 이름붙이고 1,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2년을 머물렀다. 외가인 해남윤씨 문중에서 마련해준 초당(艸堂)으로 옮겨 11년을 지내며, 세 굽이 산길 걸어 백련사 혜장스님과 우정을 쌓았다.

 

월출산 남쪽 산허리에는 무위사와 백운동원림과 태평양 셜록 다원과 월남사지가 이웃하여 늘어서 있다. 무위사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극락보전이 있다. 백운동 원림은 담양 소쇄원과 보길도 부용정과 더불어 호남 삼대 정원으로 꼽힌다. 월남사지 삼층석탑 뒤로 보이는 월출산이 참으로 예쁘다. 절터 앞 찻집에서 차 한 잔 마시는 여유는 색다른 즐거움이다.

 

▲ 전라병영성. 성곽과 성문만 남았다. 텅 빈 성안을 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섰다.  © 화순매일신문

 

▲ 빗살무늬담장. 하멜 일행이 쌓았다는 네덜란드식 담장이다.  © 화순매일신문


다산의 발자취가 깊어 유배길을 따라가도 하룻길이요. 월출산 아랫동네만 거닐어도 하루해가 짧다. 대신 강진의 역사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예로부터 북쪽에는 개성상인, 남쪽에는 병영상인이라고 했다. 병영상인은 장보고 청해진과 함께 시작하여 전라병영성이 축조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영랑생가를 나와 까치내고개 넘어 전라병영성으로 갔다. 조선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였다.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광주에 있던 전라병영을 1417(조선 태종 17)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옮겨왔다. 1894(고종 31) 동학농민전쟁으로 불타고 1895년 갑오경장 신제도로 폐영되었다. 성곽과 성문만 남았다. 온갖 풍상을 겪은 듯한 나무 한 그루가 외로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은 <하멜 표류기>(1666)의 저자 헨드릭 하멜(1630~1692)을 기억하는 공간이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으로 1653(효종 4) 일본으로 가던 중 태풍으로 제주도에 표착했다. 탈출하기까지 서울강진여수를 거치는 13년 세월 중, 병영에서 7년을 지냈다.

 

흉년으로 보급이 나오지 않을 때는 담장을 쌓고 나막신을 깎으며 생계를 이어갔다. 네덜란드식이라는 빗살무늬 담장은 납작한 돌을 15도 정도로 뉘어 이어나가고, 그 위층은 반대 방향으로 놓아 엇갈리게 쌓는 방식이다. 골목길에는 질긴 희망과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의 흔적이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 강진만 생태공원. 좌측이 강진만 우측은 남포마을 정면이 만덕산이다.  © 화순매일신문


고려청자박물관 가는 길에 강진만생태공원에 들렀다. 남포마을 앞에 있다. 강진만은 남해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주요 뱃길이었다. 내륙 깊숙이 들어와 탐진강과 만난다. 탐진이라는 이름은 탐라국이 신라에 조공을 바치러 들어온 나루였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남포는 강진만의 중심 포구였다. 전라병영성 외창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남포마을로 들어오는 뱃길이 열려 있었다고 한다. 폐항이 된 후 바다는 개울처럼 얕아졌고 갈대로 뒤덮였다. 갈대밭 사이로 짱뚱어가 뛰어놀았다.

 

남포마을에서 우측으로 가면 백련사와 다산초당이 나온다. 좌측으로 강진만을 따라 내려갔다. 칠량옹기 봉황마을이, 강진 유일의 유인도 가우도, 고려청자 박물관을 지나 마량항까지.

 

▲ 고려청자박물관. 제작 기술을 엿보고 흙을 빚어 보는 체험이 가능하다.  © 화순매일신문


고려청자박물관은 대구면에 자리잡았다. 은은한 꽃향기를 흙에 아로새겨 푸른빛에 담았다는 반짝이는 그릇이 반겼다. 봄에는 모란과 작약을, 여름에는 연꽃과 물가 풍경을, 가을에는 국화를 그렸다고 했다. 제작 기술을 보고 흙을 빚어 보는 체험도 할 수 있었다.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는 200여 개에 이르는 청자요지가 분포하여 고려청자의 시작부터 발전, 쇠퇴까지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양질의 고령토가 나오고 편리한 해상 교통로까지 갖춰 고려 초기부터 후기까지 500, 질 좋은 청자를 만들어 냈다. 고려청자의 산실이자 보고라고 할 수 있겠는데, 국보급은 아니더라도 보물급 청자 한 점도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마지막 여정인 마량항. 제주말이 한양으로 가려고 육지에 도착하여 일정 기간 육지 적응 기간을 보내며 잠시 머물렀다고 해 마량(馬良)’이다. ‘까막섬상록수림도 고금대교도 바다도 모든것이 아름다웠다. 미항(美港)이라 불릴 만했다. 고려청자를 싣고 개성으로 가는 뱃길의 시작점이었고, 임진왜란 때는 전함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순신 장군이 장흥 회령포에서 배설이 감춘 배 12척을 이끌고 조선 수군을 재건할 때도, 명량으로 향하던 왜군의 함선도 이곳을 지났다.

 

▲ 마량항. 포구와 마량까막섬과 바다와 하늘이 잘 어우러진 미항.   © 화순매일신문


강진은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서로 모나지 않게 잘 어울려진 고장이다. 가을이 깊을 때 정약용 유배길을 따라 걸으며 가우도 출렁다리에서 갈대 수런대는 소리 들을 것을 생각하며 고금대교를 건넜다.

 

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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