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는 진도만 한 곳이 없다

민속문화예술특구, 진도 소리여행
운림산방·세방낙조·토요 민속여행

김재근 객원기자,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 | 기사입력 2024/09/05 [08:01]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예술로는 진도만 한 곳이 없다

민속문화예술특구, 진도 소리여행
운림산방·세방낙조·토요 민속여행

김재근 객원기자,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 | 입력 : 2024/09/05 [08:01]

▲ 벽파정.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에서 본 모습.  © 화순매일신문


진도
(珍島)는 섬이다.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그런데 섬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진도대교(珍島大橋) 때문이다. 전라남도 해남군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울돌목이다. 한자로는 명량(鳴梁)이다. 물살이 세고 거칠다. 이곳에서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1984년에 다리가 놓였다.

 

824일 토요일, 진도대교를 건넜다. 예불여진도(藝不如珍島), ‘예술로는 진도만 한 곳이 없다는 섬에 들어섰다. 밭일하는 아짐은 남도들노래 한 자락 애간장 녹이게 뽑아내고, 논일하는 아재도 육자배기 정도는 할 줄 안다고 하니 그 비유가 당연하다 싶다.

 

첫 여정(旅程)은 벽파진(碧波津).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항구다. 진도와 육지를 건너는 가장 가까운 곳이 울돌목이지만, 물살이 거칠어 배를 띄우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해남을 오가는 배는 벽파항이 최상이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이곳에서 명량해전 최후의 전술을 고민했다.

 

뒤로 높지 않은 바위 언덕에 벽파정(碧波亭)이 있고, 정상에서는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忠武公 碧波津 戰捷碑)’가 웅장하게 바다를 내려다본다. 1956년 진도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명량해전에서 크게 이긴 것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순절자들을 기록했다. 글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썼다. 소전은 진도 출신으로 소전체로 일가를 이룬 당대의 명필이었다.

 

▲ 궁궐지. 용장성 안 궁궐지 개성 만월대 형식을 따랐다.  © 화순매일신문


벽파진은 삼별초 대몽항쟁의 중심이었던 용장성의 관문이기도 했다. 고려 무신정권은 몽고군에 쫓겨 강화도로 들어가 39년을 머물렀다. 원종이 항복하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삼별초군은 이를 거부하고 왕온()을 황제로 추대했다. 총지휘관 배중손(裵仲孫)은 일천여 척의 배를 이끌고 127062일 강화도를 출발하여 2개월 17일 항해 후 벽파진에 도착했다. 용장성에 터를 잡았다.

 

1271(원종 12)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 정부군과 홍다구의 몽고군도 벽파진에 상륙했다. 515일 여몽연합군은 삼별초를 깨뜨렸다. 진도를 남으로 휩쓸며 남도진성까지 몰아붙였다. 왕온도 배중손도 죽었다. 김통정(金通精)은 생존자를 이끌고 제주도로 후퇴했다. 삼별초 전쟁은 진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많이 죽고 많이 끌려갔다.

 

용장성 홍보관을 나와 진도읍 쪽으로 4km 남짓, 왼쪽 언덕에 꼬막 껍데기를 엎어 놓은 듯한 묘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정유재란 순절 묘역(珍島 丁酉再亂 殉節墓域)’이다. 명량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곧바로 북상했고, 왜군은 진도로 상륙하였다. 이때 맞서 싸우다 죽은 이들이 묻힌 곳이다. 232기의 무덤 중 16기 이외에는 주인이 없다. 삶의 터전을 지키며 이름도 남기지 못한 그 죽음들이다. 도로표지판이 없어 겨우 찾은 인적 끊긴 사당 뜰을 따가운 햇살만 서성거렸다.

 

▲ 운림산방. 지금의 운림산방은 남농 허건의 노고이다.   © 화순매일신문


남화의 산실 운림산방(雲林山房), 조선말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말년에 거처한 화실 당호다. 첨찰산 깊은 골에 운림(雲林)이 가득한 곳에 앉은 산방(山房)이란 뜻이다. 전통 정원이 천원지방이라 하여 사각형 테두리를 두르고 중앙에 원형으로 된 섬을 둔다. 이곳은 오각형이다. 창경궁 연못을 본떠 오행에 따른 오방색을 구현했다.

 

스승인 추사가 세상을 뜨자 운림산방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소치는 먹고 살기 힘든 진도를 떠나라고 아들에게 유언했다. 그의 손자 남농 허건은 목포에 터를 잡았다. 소나무를 잘 그렸다. 그림을 사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지금의 운림산방은 그의 노고다. 소치 이래로 그 가계(家系)에서만 5대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진도 여행의 꽃은 토요민속여행이다. 두 곳에서 공연이 열린다. 향토문화회관은 진도읍에 있고 2시 공연이다. 국립남도국악원은 남쪽 바닷가 아리랑 마을에 자리잡고 3시 공연이다. 이동 거리는 차량으로 30여 분. 모두 무료다. 신이여,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결국 신발점을 쳤다. 향토문화회관으로 갔다.

 

▲ 남도진성. 보존이 잘된 성으로 꼽힌다.  © 화순매일신문


공연의 여운을 되새기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도착한 남도진성. 삼별초군이 최후까지 격전을 벌였고, 배중손도 여기서 죽었다. 1990년 초만 하더라도 성안에 민가가 있었다. 지금은 없다. 그들이 실향민이 되면서 소중한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린 것만 같다. 관아 건물만 들어선 성안이 휑뎅그렁했다.

 

성에서 서쪽으로 바닷길을 따라 나아갔다. 마지막 여정 세방낙조다. 중앙기상대가 한반도 최남단 제일의 낙조 전망지라고 보증했다. 해와 바다 사이가 두 뼘 정도 되었다. 전망대에서 바다로 가는 데크가 있다.

 

발아래로 태풍이 지나간 강물처럼 바다가 흘렀다. 진도는 물길이 거칠기로 우리나라 제일이다. 이곳 전망대 남쪽, 팽목항 앞 바다에 크고 작은 섬 150여 개가 모여 있다. 새 떼처럼 많다고 해서 이름마저 새섬’, 조도(鳥島)군도다. 장죽도맹골도거차도독거도 수로가 모두 사납다. 세월호도 이 물살에 잠겼다.

 

자연산 돌미역 중 으뜸이 진도곽(珍島藿)이다. 조도군도에서 건져 올렸다. 물살이 빨라 오염된 바닷물이 머무를 새가 없고, 질긴 생명력으로 거친 물살을 이겨내고 자랐다. 줄기는 오독오독하고 이파리는 쫄깃쫄깃하다. 산모용으로 최고다. 두어 시간 폭 고아야 한우 사골 같은 진한 국물이 우러난다. 그래서 사골 미역이다.

 

해가 바다에 가까워졌다. 섬과 섬 사이에서 빨갛게 변하는가 싶더니 바다와 하늘을 주황빛으로 채워나간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노을을 보고 산에 불이 난 모습이라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해가 산들에게 잘 자라고 인사하는 거야. 내일 아침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잊지 말라고 아름다운 빛을 비춰주는 거란다.”고 했다. 세방낙조가 저리 붉은 것은 무슨 연유인지.

 

▲ 세방낙조. 흐르는 바다 위로 주황색 낙원이 펼쳐졌다.  © 화순매일신문


진도를 이야기하던 진도가 고향이라던 아리따웠던 분이 육자배기 가락으로 진도아리랑을 불러주었었다. 소리가 맑았다. 장독대 곁에 피어난 봉숭아 꽃잎 같았고, 샘물에 떠 있는 하얀 구름 같기도 했다. 노래가 끝나고, 옛 기록에 땅이 기름지고 농수산물이 풍부하다며 옥주(沃州)라고 했다지만 그렇지 않다며, 진도 호미는 끝이 날카롭다고 했다. 뭉툭해서는 자갈밭을 팔 수 없다면서.

 

진도는 유배의 땅이었다. 얼마나 많이 왔으면 조선 영조 때 전라감사가 진도에 유배자가 너무 많아 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죄 없는 섬사람들까지 굶어 죽을 판이니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는 건의까지 했을까.

 

울돌목에선 조선 최대 해양 참사가 일어났다. 1656(조선 효종 7) 추석에 전남 우수사 이익달(李益達)이 주민들의 태풍 경고를 무시하고, 수군 훈련을 강행했다. 전선들이 깨지고 떠내려가고 가라앉았다. 이때 죽은 수졸(水卒)1천여 명이었다. 진도군수도 빠져 죽었다. 이익달은 크게 책임지지 않았다.

 

거친 자연환경두 번의 국제전쟁유배의 땅, 긴 세월 시련과 한이 어찌 없었겠는가. 인간이 인간다운 건, 잊지 않아서다. 진도의 창은 진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진도아리랑> 부르며 삶을 자위하고, <진도씻김굿>으로 죽음을 위로하고, <진도다시래기>로 상주를 달래고, <진도만가>로 북망산천으로 가는 길을 열면서. 잊지 말라고 노을이 붉게 타오르듯 그들도 기억하기 위해 노래를 불렀으리라.

 

진도는 숨겨둔 나라 같았다. 아쉬웠다. 깊이 감추어 둔 무언가를 다 보지 못한 듯해서다. 남도국악원 공연이 토요일, 향토문화원 공연이 일요일. 아니 반대라도 괜찮겠다. 토요일 공연 후, 세방낙조에 젖어 들고, 일요일 공연까지 즐기며 느긋하게 둘러보면 더 잘 보일 것 같은데. 진도대교가 있으니 자주 들르라는, 진도군의 깊은 뜻일 수도 있겠다. 다리 건너니 해남 땅이다.

 

남도한바퀴에서 만난 인연을 이어 세심한 안내를 해주신 한정숙용장성에서 진도 이야기를 깊게 들려준 한석호운림산방에서 만난 김인영 진도군 전남문화관광해설사께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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