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선 탄광열차는 추억을 싣고 달리고 싶다

<기고>구충곤 화순군수

화순매일신문 | 기사입력 2019/10/18 [08:01]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화순선 탄광열차는 추억을 싣고 달리고 싶다

<기고>구충곤 화순군수

화순매일신문 | 입력 : 2019/10/18 [08:01]

▲ <그림> 구충곤 화순군수.   © 화순매일신문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 화순의 산하가 조금씩 붉은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발걸음은 동면 방향으로 향한다. 어느덧 천운장 마을 입구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흑토재 아래에 오래된 역사(驛舍)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때에 만들어진 낡은 역사이며, 잡초 만 무성하게 우거진 상태이다. 복암역이다. 화순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을 실어 나르던 화순선의 종착역이다. 녹슨 철도 레일은 잠들어 있고, 그 옆의 전신주는 절단된 채 세월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석탄은 산업혁명 이후 열차와 선박 등의 운송수단은 물론이고 난방을 위한 대표적인 연료였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석탄을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평양의 야산에서 석탄을 채굴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검정색이어서 흑토(黑土)’, 태워도 연기가 나지 않아 무연탄(無煙炭)’이라고 했다.

 

석탄을 황토와 진흙에 버물려 취사나 난방 용도로 사용했다. 군영에서 초소의 야간 보온용으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석탄이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이후였다. 주로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탄광이 집중 개발되었다. 화순에서 광산이 개발된 것은 일제가 조선을 병합할 무렵이었다. 화순의 대표적인 탄광은 동면 천운장 마을에서 구암리로 넘어가는 흑토재 일대에 위치했다. 예로부터 산기슭에서 검은 색의 흙이 존재하여 흑토재라고 불렀다. 현재 흑토재는 국도 15호선(22, 29호 중복)이 지나가고 있으며, 그 아래에 화순탄광이 위치한다. 무연탄 광산이다. 화순탄광은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탄광이다. 화순탄광이 개발되면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뇌리에 화순하면 탄광이 떠오르게 되었다.

 

화순탄광에서 석탄을 처음으로 채굴한 박현경

화순탄광의 역사는 박현경(朴賢景)1905년에 광업권을 등록하면서 시작되었다. 박현경이 광업권을 획득했을 때는 전남탄광이라 했다. 박현경이 전라도 관찰부 주사(현재 도청 국장급)에 임명되어 탄광을 개발할 수 있었던 배경은 갑신정변의 주역 중의 한 명으로 알려진 박영효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현경과 박영효는 처남매제 사이의 인척이었다.

 

▲ 옛 복암역사 모습.  © 화순매일신문

박현경은 화순의 부호였던 박인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인규는 800석을 걷어 들이는 지주였다. 박현경은 석탄 채굴에 필요한 토목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다. 일본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하여 1908년에 흑토재 일원에서 석탄을 굴착하기 시작했다. 1918년 일제가 토지조사 사업을 끝낼 무렵에 흑토재 일대의 임야와 토지를 사들여 동암탄광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박현경은 석탄을 채굴하여 샘플을 일본에 보냈다. 탄질이 좋지 않아 판로개척이 쉽지 않았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운영상의 어려움마저 겪었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본인 지질학자에 의해 전남탄광에 무연탄과 토상 흑연광산이 분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어려움이 다소 해소되었다. 박현경은 다시 탄광 운영을 시작하였다. 광주송정리를 연결하는 철도, 광주여수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설되면서 석탄 수송의 물류체계도 개선되었다. 박현경은 1927년부터 100여 명의 노동자를 투입해 하루에 78톤의 석탄을 채굴하였다.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보냈다.

 

그러나 동암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의 판매 가격은 운송비에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박현경은 19347월에 이르러 일본인이 세운 광주의 종연방직에 전남탄광을 매각하였다. 종연방직은 1925년에 광주에 세워졌으며, 1930년에 이르러 사세를 크게 확장하면서 동암탄광을 인수했다. 종연방직은 광주에 세워진 제사공장과 방직공장의 가동에 필요한 에너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동암탄광을 매입하였다. 동암탄광은 종연탄광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종업원의 숫자는 16001700명에 이르렀다. 곧이어 복암역이 세워지고 화순선의 철도 노선이 연결되었다. 석탄 수송을 위해 화순역과 복암역을 연결하는 11.1의 화순선이 1942년에 사설 철도로 개통되었다. 화순역과 복암역 사이에는 남화순역과 장동역이라는 2개의 간이역을 두었다. 복암역은 탄광을 왕래하는 철도의 종착지가 되었다. 분기점에서 기차를 돌리지 않고, 다른 차선으로 후진해서 붙이는 방식으로 도착과 출발 지점의 문제를 해결했다. 기차의 앞뒤가 들어올 때와 나갈 때에 달라지는 방식이다.

▲ 동면 촬동마을 앞에 세워진 박현경의 시혜불망비.     © 화순매일신문

 

화순 동면에는 종연탄광 외에 또 다른 탄광이 존재했다. 박현경이 동암탄광을 세울 무렵 일본인이 세운 회사이다. 일본인 회사는 남선탄광이며, 종업원의 숫자는 14001500명 정도 되었다. 동면에 세워진 2개의 탄광은 일본인 사장과 소장 아래에 한국인 책임자가 임명되었다. 광부들은 일본 사장과 조선인 간부들의 이중적인 착취 아래서 고통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탄광이 군수산업으로 인정받아 광부들이 징병·징용에서 제외되었지만, 열악한 환경 아래에서 무리한 채굴 작업에 동원되기 일쑤였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탄광이 호황을 누리면서 구암리, 천덕리, 오동리(천운동)의 광산촌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면에서 조금 떨어진 화순읍 일원에도 연탄공장이 세워졌다.

 

해방 이후 화순탄광은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전국적으로 건국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화순도 예외가 아니었다. 화순탄광도 공장 책임자를 중심으로 자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화순에 미군이 들어오면서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미군은 탄광과 부속 시설을 군정의 관할 하에 두었으며, 종연탄광과 남선탄광을 합해 화순탄광이라 했다. 미군정이 석탄을 실어가면서 대금을 지불하지 않아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광부들은 식량이나 자재 확보를 위해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미군정은 들어주지 않았다. 1946815일 새벽, 해방 1주년 기념식을 치르기 위해 광부들은 광주로 출발했다. 이들의 행진은 너릿재에서 미군에 의해 무력으로 저지되었다. 광부들은 투쟁에 들어갔고, 총파업이 미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화순 경제의 대동맥 화순선 철도

화순탄광은 1950년에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로 개편되었다. 1955년에는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탄맥이 발견되어 전 국민을 흥분시켰다. 예전의 탄맥을 훨씬 능가하는 보유량과 품질을 가진 탄맥이 여러 개 확인되었다. 탄맥마다 200만 톤 이상의 채굴량을 보유하였다. 화순탄광이 호황을 누리면서 종사자가 5,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월급날에는 읍내가 들썩였다. 탄광의 호황과 더불어 1960년대에 화순의 인구는 15만 명에 달하였다. 화순광업소는 초기에는 북갱(北坑) 단일체제로 운영되었다. 1960년 이후 남갱을 신설하면서 생산량이 대폭 증대하였다. 1988년 남갱을 폐쇄하고 복암갱을 신설하였고, 이듬해에 개광 이래 최대치인 705천 톤을 생산하였다.

 

▲ 연탄을 실은 기차가 화순선을 달리고 있다.     © 화순매일신문

화순광업소에서 채굴된 석탄은 화순선 철로를 통해 여러 곳으로 실려 나갔다. 화순의 석탄은 점착성이 뛰어나 연탄을 만드는 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였다. 탄광이 많은 강원도에서도 화순의 석탄을 구입하여 섞어 사용할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석탄은 대부분 메탄가스가 발생하는 등 질이 좋지 않는 편인데, 화순탄광의 탄은 품질이 좋아 인기가 높았다. 석탄 1톤으로 연탄을 276장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화순에서 채굴된 석탄으로 대략 70억 장의 연탄을 생산했다. 전체 생산량 가운데 91.4%212천 톤을 전국 6개 권역의 30여 개 연탄공장에 판매하였다. 호황을 누리던 석탄도 석유와 가스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사양 산업으로 분류되어 폐광이 늘고 있다. 1988년부터 경제성이 낮은 탄광이 점차로 폐쇄되는 등 전국의 석탄 생산량은 감소되고 있다.

 

화순의 탄광촌도 쇠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탄산업의 퇴조로 인하여 화순광업소의 규모가 축소되고 광산촌 인구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화순의 인구는 1967년에 151,637명으로 최대치에 달한 후 계속 감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탄광산업 역시 석유에게 서민의 연료 자리를 내준 뒤 연탄공장이 사라지는 등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국의 광산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화순탄광도 폐업을 앞두고 있다. 화순탄광의 채굴량이 줄어들고 종사자의 숫자가 감소하면서 화순역과 복암역을 왕래하던 기차마저 멈추었다. 복암역은 역무실과 대합실까지 갖춘 번듯한 역이었다. 석탄 수송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196070년대에는 사람도 실어 나르고 세상 소식도 전하면서 두 몫 세 몫의 역할을 하였다.

 

화순역과 복암역 사이에는 남화순역(화순읍 삼천리 소재)이 있었다. 남화순역은 일제강점기 때에 만들어진 후 6.25 때 소실을 거쳐 1961년에 역사를 증축하였다. 1974년에 여객의 승하차가 중지되었고, 1982년에는 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1984년에 이르러 폐역되는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 화순선 철도의 시작역과 종착역, 간이역을 담은 지도.     © 화순매일신문

남화순역은 탄광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광주와 화순을 왕래하는 버스가 없었던 시절에는 화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화물 열차 뿐만 아니라 여객 열차로도 활용되었다. 복암역을 출발하여 화순역을 경유하여 앵남 방향으로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데, 옛날 기관차는 힘이 없어서 남화순역까지 밀렸다가 간신히 올라서곤 했다. 3번에 한번 꼴로 성공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화순선 철도는 197080년대만 해도 하루에 석탄을 실은 기차가 서너 차례 운행하였다. 화순선 철도는 1974년에 남화순역이 폐지되었고, 1984년에 이르러 복암역이 문을 닫게 되었다. 복암역은 19741월부터는 일반 승객을 받지 않았고, 1982년에 간이역으로 강등되었다. 2년 후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장동역마저 1986년에 문을 닫게 되면서 화순선 전체가 대한석탄공사 전용선로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역무원 두 명이 근무했다. 하지만 석탄합리화 조치 이후 석탄산업이 하강곡선을 타면서 운행이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석탄산업의 침체와 도심을 통과할 때 탄가루가 날리는 등의 민원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201412월에 이르러 열차의 운행이 종료되기에 이르렀다. 동면 탄광 일대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복암역 주변은 여전히 탄가루가 날리고 있다. 하지만 탄광 주변의 단풍은 어느 지역보다도 곱다. 탄광촌의 검은색 때문에 단풍의 색채가 돋보인 것 같다. 지난 100년 동안 돌과 석탄 그리고 물 세 가지 밖에 없는 화순탄광의 지하 1,500m 막창에서 화순 경제의 초석을 만드신 산업 역군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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